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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 당신에게 있습니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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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2) ...
       
 
  
 

양선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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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2일 일요일


당회장 이재록 목사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3)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는 마음에만 맺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한 행함으로 드러납니다. 그 중에 양선의 열매가 마음에 온전히 맺히면 그리스도의 향이 발해지므로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양선의 열매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1.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

세상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 '이것은 선하다.' 혹은 '악하다.' 분별하고 평가합니다. 스스로 양심에 거리낌이 없으면 나름대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하지요. 하지만 양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양심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양심이란 '본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어떤 기를 받고 태어나는지, 또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 등에 따라 달라지지요.

선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난 자녀는 비교적 본성이 선합니다. 또 좋은 환경 속에서 선한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자란 사람은 양심이 선하게 만들어지기 쉽지요. 반면, 악한 부모의 기를 받고 태어나 악한 것을 많이 접하면 본성과 양심이 악해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정직을 중요하게 교육받은 아이는 작은 거짓말을 하고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만, 늘 거짓말 속에서 자란 아이는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하면서도 태연하지요. 이렇게 양심은 사람마다, 지역과 시대마다 서로 다르며 나름대로 양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결국은 '자기 보기에 선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성도들은 선악과 시비를 구별하는 기준이 항상 동일합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진리, 곧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진리를 기준 삼아 행하려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2. 선을 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

'양선(良善)'은 '어질고 착하다'는 뜻으로서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곧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기 때문에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나옵니다.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선한 말과 선한 행실로 덕과 사랑을 베풀지요.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양선한 사람에게서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런데 선을 추구하는 마음만 간절하다고 해서 양선의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보고 듣고 배웠으면 그것을 반드시 자기 마음에 이뤄야 하고 직접 행함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떻게 양선을 행하였는지가 잘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사장이 그를 보았지만 그냥 피해 가버렸습니다. 레위인도 그를 보았지만 지나쳐 버렸지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율법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하나님 뜻을 행해야 할 순간에 행함을 내보이지 못하였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 주며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 준 뒤 주막 주인에게 그를 돌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지불하겠다고 약속까지 하면서 떠났지요. 양선의 마음이 있었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물질이나 시간으로 손해를 본다 해도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지요. 그냥 지나쳤다면 '다친 사람은 어찌 되었을까.' 하며 마음에 두고두고 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양선은 선을 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입니다.


3. 예수님의 양선의 마음

마태복음 12장 19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흔히 "저 사람은 참 착하다, 참 선하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을 보면 누구와도 걸리거나 부딪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말씀처럼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 할 정도로 조용하여 다투는 일도 없지요. 상대의 티나 허물을 드러내어 말하지 않으며 자신을 드러내어 높임 받으려 하지도 않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당한다 해서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그 다음 20절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무나 화초를 키울 때 상한 잎이나 가지가 매달려 있으면 깨끗하게 잘라내어 버리기 마련입니다. 또한 심지가 꺼져갈 때는 그 빛도 밝지 않고 그을음이 심해지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아예 불을 꺼 버립니다. 그러나 양선의 마음이 있으면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의 하나라도 회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차마 단호하게 그 생명을 끊어버리지 못하므로 어찌하든 살 길을 열어 주고자 하지요.

여기서 '상한 갈대'란, 영적으로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꺼져 가는 심지'란 '마음이 악으로 심하게 물들어서 그 영혼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는 사람' 이지요. 이런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 같은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 행함을 보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성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기 쉽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놀라운 권능을 보면서 여전히 믿지 않고 악을 발하며 성령의 역사를 대적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도 끝까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원받을 기회를 열어 주셨지요.

양선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악을 발하는 사람들을 품어 줍니다. 굳이 시비를 따져 상대의 잘못을 드러내거나 상대를 꺾어 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선대하여 그들을 녹이고 오히려 감동을 주지요.

물론 상대가 너무 악하여 내 편에서 아무리 선하게 대해도 결국은 사망의 길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도 내 편에서 '여기까지만 참자.' 하며 한계를 두고 그 선을 넘으면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리고자 애쓰는 것이 양선의 마음이지요. 어찌하든 구원받을 수 있도록 계속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양선이 다른 영적인 덕목들과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요? 예컨대,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구제와 긍휼의 마음이 아닌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물론 구제와 긍휼도 결국 선에 포함되는 덕목입니다. 그러나 '양선'에서 더 부각되는 측면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로 선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상대의 어려움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긍휼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긍휼히 여겨야 할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선의 마음이 양선이지요.

다른 예를 들어, 충성을 해도 양선의 열매가 맺히면 어느 한 분야만이 아니라 온 집에 충성하게 됩니다. 만약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분야 중에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생기고, 하나님의 나라가 잘 이뤄지지 않을 수 있기에 온 집에 충성하려는 것입니다. 그 밖에 여러 항목도 이렇게 적용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양선의 열매를 맺으면 주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소자를 실족시키거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외면적으로도 선과 겸손이 풍겨 납니다. 주의 교양으로 범사에 존경받을 만하며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 등이 온전해지지요. 양선의 열매를 온전히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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