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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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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2일 일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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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 4:16)

만민중앙성결교회 당회장 이재록 목사
Senior Pastor Dr. Jaerock Lee
- 예수교연합성결회 총회장
- (사) 기독교 세계부흥선교협의회 상임총재
- (사) 국회사랑 구국기도 총연합회 공동총재
- 세계기독방송네트워크(GCN) 이사장
- 세계기독의사네트워크(WCDN) 이사장
- 만민국제신학교(MIS) 이사장
- 연합성결신학교 이사장
- 목회학 박사, 명예신학 박사
- 만민중앙성결교회 당회장
- 기독교방송, 극동방송 등에 방송 설교
- 미국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메릴랜드, L.A., 하와이, 일본, 인도, 파키스탄, 필리핀, 아르헨티나, 온두라스, 페루, 러시아, 독일,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콩고민주공화국, 이스라엘 예루살렘, 에스토니아 등에서 연합대성회 인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차원인 온 영(살전 5:23)의 완성을 이루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근본 속성인 사랑과 공의를 이해하며 닮아가 사랑과 공의를 적절히 조화시켜 온전한 사랑의 완성을 이뤄야 합니다" - 기관장 교육 '사랑' 중에서
온 영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 차원의 사랑을 바로 알고 더불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밝히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 사랑과 공의가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게 온전히 하나로 조화시켜야 하지요. 이는 사랑과 공의가 똑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대상에 따라 하나님 뜻에 맞게 그 비율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악을 버리고 영으로 들어왔다 해도 아직 선과 사랑, 진리의 지식이 결여되거나 부족한 상태이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해하기 어렵고 그것을 온전히 조화시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온 영으로 들어왔다 해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다 이해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룬 사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룬 사례
만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공의대로만 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죄인에게 어떠한 기회도 다시 주어지지 않고, 은혜도 베풀어지지 않은 채 영계의 법칙 그대로 죗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이 온전히 적용된 공의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되, 공의를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늘 최대한의 사랑을 베푸신 것을 볼 수 있지요.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1) 노아의 홍수 심판
창세기 6장 5~7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공의가 찰 때까지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참고 참으셨겠습니까? 마침내 심판을 결정하시고도 당대 의인 노아를 통해 심판이 다가옴을 외치고 외치게 하셨지요. 누구라도 노아의 말을 듣고 예비된 방주 안으로만 들어오면 살 수 있다고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노아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노아의 가족만 방주에 탄 채 모든 심판의 준비가 끝이 났지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문을 닫은 이 마지막 순간에 7일이라는 유예기간을 더 주십니다.
그때라도 누구든지 방주의 문을 두드린다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또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되, 할 수만 있다면 어찌하든 기회를 주고 또 주어서라도 살리기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애절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 소돔과 고모라의 불 심판
창세기 18장 20~21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기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는 것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밝히 아십니다. 그런데도 굳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왜 미리 알려주시고, 확인해 보겠다고 하신 것일까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 때문입니다. 의인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통해 어찌하든 구원의 기회를 더 넓혀주려고 하셨지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놓고 하나님 앞에 여러 차례 간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어찌하든 살리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간구를 올렸고,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치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천사장을 보내어 소돔 성을 살펴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 큰 성에 겨우 열 명의 의인이 없어서 결국 불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조카 롯과 그의 딸들은 구원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쌓은 공의를 통해서라도 그의 조카 롯과 딸들을 구원해 주신 이것이 바로 끝까지 사랑으로 공의를 완성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에스겔 18장 23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했습니다. 악인과 죄인은 쌓은 죄악대로 심판을 받는 것이 공의이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도 어찌하든 사망의 길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시지요. 구원받을 최소한의 공의만이라도 쌓으면 어찌하든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더 간절하십니다.
3) 니느웨 성에 대한 심판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 족속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사랑으로 공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니느웨 성에 대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욘 1:2) 하셨지요.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로 쌓였으면 그냥 멸하셔도 공의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 멸망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외치게 하셨을까요?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에 니느웨 성의 반응은 놀라웠습니다. 왕을 비롯해 모든 신하와 백성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지요. 가축들까지도 함께 금식하게 하였습니다.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남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시기를 구했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한 것 곧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욘 3:10). 이때가 시기적으로는 B.C. 760년경입니다.
그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에 대해 다시 한번 멸망의 심판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바로 나훔 선지자를 통해서이지요. 구약성경 나훔서에는 니느웨 성이 당할 멸망의 심판이 아주 참혹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거리에 시체가 높이 쌓일 정도로 혹독한 심판이 임할 것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니느웨 백성이 이러한 경고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아 결국 니느웨 성은 B.C. 612년에 멸망하고 말지요.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미 한 번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겨우 100년 만에 또다시 죄가 관영해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한계에 이르니 어떻게 하셔야 되겠습니까?
"그렇게까지 기회를 주었는데,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용서해 주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다"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훔 선지자를 통해 다시금 기회를 주시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주셨지만, 그들은 이 기회를 잡지 않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4) 장차 일어날 7년 환난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 구원받을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부활체의 몸으로 변화되어 순간에 휴거됩니다. 이것으로 인간 경작은 마쳐지고,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참혹한 7년 환난이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들 중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인간 경작이 다 마쳤으니 이제 끝이다" 하며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예비해 주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 명의 전도자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시지요.
이때 주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 중에 그제야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깨닫는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14만 4천 명의 전도자들을 통해 주님을 영접한 이들은 대부분 7년 환난 동안 자연 재해나 전쟁으로 인해 비교적 수월하게 죽음을 맞으면서 구원에 이르게 되지요. 비록 복음을 몰라서 휴거에는 동참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선이 있는 이들에게는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참혹한 순교를 해야 구원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복음을 듣고 휴거 이전에도 믿는다 했지만 참 믿음을 갖지 못했던 쭉정이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믿음을 지켜야만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잡을 수 있지요. 물론 그나마 이렇게 해서라도 구원받으면 다행이겠지만, 그 경우가 극히 드물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7년 환난에 떨어지지 않고 참 믿음으로 휴거되기를 원하시지요.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최대한 쭉정이 신자가 나오지 않도록 성령의 대폭발적인 역사로 인간 경작의 마무리를 지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거되지 못한 쭉정이 신자들을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순교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시지요. 바로 그 사명이 본 제단에 있기에 우리는 대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휴거된 이후에도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고 순교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대성전 안에 남기게 되지요. 무서운 심판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순간에도 끝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주님의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룬 사례
1) 십자가 사역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에 따라 죄인들은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내기 원하셨기에 공의 안에서 그 길을 찾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것이었지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았다'는 공의대로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대속하셨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영계의 법에 따라 보혈을 흘려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공의 안에서 죄인들을 살릴 대가를 지불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에게는 살 길이 열렸지요. 공의를 어기지 않으면서 사랑으로 공의, 곧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2)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사랑과 공의의 조화를 이루신 일들이 곳곳에 나오지요. 예를 들어, 요한복음 8장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와서 묻습니다.
5절에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했지요. 즉 율법의 공의대로 하면 이 간음한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지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그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 형제의 죄를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이런 말씀들을 하셨다는 것을 알지요.
만일 이 상황에서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시면 이는 스스로 하신 말씀과 모순됩니다. 반면에 여인을 용서해 주라 하시면 모세의 율법과 반대되는 내용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지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케 하러 오셨다 했습니다. 바로 사랑으로 율법의 완성을 이루러 오셨지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무조건 용서하고 살려주자고 하신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해야 한다고 하시면 이 역시 사랑이 빠진 공의가 될 수 있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여인을 살릴 길을 찾으셔야 했습니다. 바로 사랑하면 그 방법이 보이게 되지요.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그들이 지은 죄를 땅에 쓰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셨지요. 자신들의 죄목이 하나하나 기록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둘 그곳을 떠나갔습니다. 여인을 심판하고 돌로 칠만한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지요. 예수님께서는 공의를 어기지 않으시면서도 사랑으로 여인을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당부하시지요.
만일 이렇게 큰 구원의 은혜를 입었는데도 이후에 다시 죄를 범한다면 그때는 용서받기가 이전보다 더 어렵습니다. 사랑으로써 공의의 기준을 넓히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도 끝까지 깨우쳐 주시며 돌이킬 기회를 주셨지만, 그의 배신을 억지로 막지는 않으셨습니다.
결국 자유의지 가운데 본인이 선택해야 하되, 다만 그 자유의지를 선한 쪽으로 사용하도록 최대한 붙잡아 주시는 것이지요. 가룟 유다도 끝까지 품으셨지만 결국 자기 악 가운데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해 갈 때는 억지로 막으실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한다면 인간 경작의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은 죄는 미워해도 죄인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용서받아 다시 소망을 품을 수 있는 방법을 찾지요. 상대를 판단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의 가운데 살아날 수 있도록 예수님처럼 온전한 사랑으로 심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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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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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왜 침노를 당하는가?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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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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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 당신에게 있습니까?(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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