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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 당신에게 있습니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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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2) ...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_'영적인 사랑' 시리즈 9


10078
2019년 3월 10일 일요일


당회장 이재록 목사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고린도전서 13:4~5 -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들며, 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게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냄으로써 걸려 넘어지게 하지요.
원수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놓는 대표적인 덫이 바로 미움과 성냄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말투가 퉁명스러워지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성내는 것이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에 있는 미움, 불편함이 표출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표정만 보고 '화가 났구나'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신 일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성전 뜰에서 헌금할 돈을 환전해 주거나 제물로 드릴 가축을 사고팔았지요.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으시고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이 광경을 보고 돌변하셨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지요. 사람들이 볼 때 화를 내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을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셨지요. 이는 결국 공의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 의분과 성냄의 차이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만나십니다. 마침 안식일이라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동정을 엿보았는데, 만일 환자를 고치면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여 송사하기 위해서였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막 3:4). 그들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 하심으로 회복시켜 주셨지요(막 3:5).
오직 선만 행하시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려 하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강하게 책망하심으로 어찌하든 깨우쳐 죄에서 돌이키길 원하셨습니다. 때때로 의분을 내신 것도 영혼들을 깨우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지요.
이처럼 성냄과 의분은 전혀 다릅니다. 그만큼 성결 되어 죄가 없을 때 의분 또는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나지요. 반면에 마음에 악이 있으면 선한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2. 사람들이 성내는 이유

먼저 자기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는 경우입니다. 저마다 성장한 환경이나 배움이 다르기 때문에 마음과 생각이 다르고 교양이 다르며 판단 기준이 다른데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니 감정이 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성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앞서거나 나은 위치에 있으면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요. 물론 윗사람을 존중해 주고 질서에 따라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순종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아랫사람의 말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뜻에만 따르기를 바라는 경우이지요.
이 외에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욕설을 듣거나 모욕을 당했을 때 쉽게 화를 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내기 전에 먼저 마음에서 나쁜 감정부터 일어납니다.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먼저 감정을 자극하고 결국 성내는 행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정이 상한다'는 단계가 바로 성냄의 전초 단계입니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나쁜 감정이 있는 이상 진리로 변화될 수 없으니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혈기나 분내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을 성전 삼고 계시며(고전 3:16) 하나님께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내 생각과 맞지 않다고 해서 혈기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성냄

북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아 권능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자녀가 없는 여인에게 잉태의 축복을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며 문둥(한센)병을 고치고 기도로 적군을 물리치는 등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냈지요. 또 수질이 좋지 않은 물에 소금을 넣어 좋은 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지자로서는 드물게 병들어 죽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가 벧엘로 올라갈 때입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마을에서 몰려 나와 엘리사를 둘러싸고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왕하 2:23) 조롱합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많은 아이가 몰려와 조롱하는 통에 엘리사는 곤혹스러웠습니다. 타일러도 보고 큰 소리로 꾸짖어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지요. 그만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얼마나 집요하게 괴롭히는지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벧엘은 분열왕국 시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본거지입니다. 그 인근 지역의 아이들이라면 이러한 문화 속에서 마음조차 강퍅했을 것입니다. 길을 막고 서서 침을 뱉기도 하고 욕하며, 심지어 돌멩이질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엘리사가 아이들을 저주하니 그때 근처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뛰쳐나와 순식간에 아이들을 물어뜯어 42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지요.
이 사건은 비록 아이들의 심한 조롱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엘리사에게 온전치 못한 모습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가 병들어 죽은 일은 이와 무관하지 않지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내는 것이 합당치 않음을 깨우칠 수 있는 사건입니다(약 1:20).


4. 성내지 않는 사랑을 이루려면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력이 생겨 손을 떼는 순간 튕겨져 오릅니다. 화를 눌러 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눌러 참는다면 순간의 위기는 모면한다 해도 언젠가는 폭발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내지 않는 사랑을 이루려면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마음을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감정을 버리고 선과 사랑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매일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우선 화가 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고 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화가 날 때에는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를 찬찬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내하다 보면 성나게 하는 감정까지 차츰 버려집니다. 예전에는 열 번 화내던 것이 아홉 번, 여덟 번, 점점 줄어들지요. 나중에는 아무리 화가 날 상황이 되어도 마음이 평온할 수 있습니다(잠 12:16, 19: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보고 계시며 우리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까지도 아시고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우리 마음 안에 성전 삼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 늘 거룩한 말과 행실로써 생활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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